태초에

하나님께서 “태초”라는 한 점을 찍으시며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그 점 안에는 이미 모든 것이 들어 있었습니다. 빛과 어둠, 시작과 끝,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까지 — 모두 그 점 안에 담겨 있었습니다.

창조 이후 인간의 실수로 인해 타락이 찾아왔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 모든 과정의 주인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플랜 B’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기 위한 처음부터 예정된 이야기였습니다.

태초의 하나님은 아들 하나님을 내어주실 것을 그 완벽하신 뜻 안에서 확정하셨고, 그를 통해 당신의 본질—빛과 생명—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초점은 인간의 구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그 여정 속에서 흙으로 지음받은 피조물의 본질적 한계를 드러낸 사건일 뿐이며, 오히려 하나님의 생명이 필요함을 명확히 보여 주는 필연적인 과정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초점도 ‘내가 구원받았는가?’이기 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에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인간의 타락과 구속, 회복이라는 프레임으로만 읽는다면, 결국 인간 중심의 이야기로 성경을 해석하게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누구신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태초’라는 그 한 점 속에서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완성하셨고, 우리는 그 완성된 이야기 속을 걸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태초의 점 — 그 한 점이 곧 하나님의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오직 예수

오늘의 세상은 다원화와 상대주의가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각자의 신을 믿고, 모든 종교가 결국 하나의 신으로 통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은 “아들 하나님을 죽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이 없다면 우리는 각자 다른 신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신은 죽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만든 바알신도 죽지 않지만, 우리의 하나님은 죽으셨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이해가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한 비상대책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 인간과 피로 맺은 ‘생명적 관계’를 원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와 자녀, 하나님과 백성이 생명으로 연결된 관계가 됩니다.

다른 어떤 종교도, 어떤 사상도 하나님을 알게 할 수 없습니다. 아들 하나님을 죽이신 하나님, 그분을 이해할 때만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의 중심은 언제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안에서 하나님이 드러나시고, 그분 안에서 생명이 시작되며, 그분 안에서만 우리는 참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오직 예수.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며, 생명의 시작입니다.

먼지 신학

현대 사회는 ‘나’라는 존재를 중심에 둡니다.
근대철학 —이성주의, 합리주의, 계몽주의, 실존주의—의 사상들은 결국 인간의 역량과 주체성을 신격화하며, ‘나’의 존재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태초의 인간과 같은 동일한 욕망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

인본주의의 뿌리는 우리 안에 깊이 스며들어, 하나님을 향한 본질적인 감각을 흐리게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중요해지고 싶어 하고, 스스로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하지만, 그럴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땅에 더 밀착된 존재가 되어 갑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지 가늠하게 될 때, 나의 존재감은 작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중요해지고, 내가 하는 일이 중요해지고, 내 생각과 감정이 중요해질수록, 우리는 하늘로부터 멀어지고, 흙에 속한 존재로 다시 내려앉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자신이라는 한계에 갇히고, 경직된 삶을 살게 됩니다.

성경은 인간을 흙에서 빚으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본래 먼지입니다. 바로 그 먼지 위에 하나님의 생기가 불어넣어질 때, 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내가 더 커지는 과정이 아니라, 나의 존재가 가벼워지고 투명해지는 여정입니다.

우리가 가벼워질수록 하나님의 생명은 더 드러나시고, 우리가 작아질수록 그분의 생명은 더 넓게 흘러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먼지입니다.”
이 고백은 절망의 언어가 아니라 생명의 시작입니다.
먼지 같은 존재론은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출발점이라고 믿습니다.

가벼워지세요

현대인은 너무 무겁습니다.
해야 할 일, 감당해야 할 책임, 지켜야 할 관계가 우리를 짓누릅니다. 그러나 그 무게의 근원은 외부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식입니다. 내가 중요해야 하고, 내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하며, 내가 세상에 흔적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결코 가벼워질 수 없게 만듭니다.

이 무게감은 신앙인에게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선교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부담,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신앙적 책임감을 짊어집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가장 선교적인 삶은 무거워지는 것이 아니라 가벼워지는 삶입니다.

가벼워진다는 것은 무책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신 분이시며, 결과를 완성하는 분이시고,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영역에서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무게를 내려놓을수록, 하나님의 일은 더 자유롭게 흐릅니다. 내가 힘을 뺄수록,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는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나쁜 일이란 없어요》라는 책에서 말하듯, 삶의 모든 일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기에, 우리는 가벼워집니다. 가벼울수록 생명이 흐르고, 하나님은 더 뚜렷이 드러나십니다.

가벼워지는 것, 그것이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완성하셨기에 우리는 이제 가볍게, 자유롭게, 숨 쉬듯 살아집니다.

살아 있니?

살아 있습니까? 정말 숨이 쉬어지나요?

이 질문은 우리 자신을 향한 끊임없는 질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살아 있는가? 가슴이 뛰고, 숨이 쉬어지고,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서 흐르는 감동으로 살아가는가?

생동감 없는 삶을 “사명”이라 부르고, 무겁고 경직된 일상을 “헌신”이라 포장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죽음이 고작, 죽어서 천국 가는 확신 하나를 주기 위한 일이었을까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미래의 약속일 뿐 아니라 지금 여기서 숨 쉬게 하시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은 언젠가가 아니라 오늘, 지금 그분의 생명이 내 안에 호흡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겨내는 법이 아니라 살아 있는 법을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이겨서 살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생명은 지금 이 자리에서 숨 쉬게 하는 호흡입니다. 고요한 순간에도, 혼란의 한가운데서도 “살아 있다”는 실감이 일어나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살아 있니?
정말 숨 쉬고 있니?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 질문에 솔직하게 답할 수록 살아날 수 있습니다. 숨 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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